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프리드리히 1세(신성 로마 제국) (문단 편집) == 상세 == 본인의 능력과 업적도 대단하긴 했지만 그 이상으로 화려한 [[기사도]]적 전설로 채색된 인물 중 한 명이다. 이는 황제로서 [[십자군 전쟁]]에 참전한 거의 유일한 사례였기 때문. 이런 탓에 전설과 역사를 분리해 살피는 일에 주의해야 하는 인물이기도 하다. 해외에서는 [[이탈리아]]의 군주들 및 [[교황]]들과 대립했고, [[독일]] 내에서는 특히 [[하인리히 사자공]]과 평생에 걸친 라이벌이었다. 사자공은 황제가 아니었을 뿐, 소유한 영지의 넓이에서 뿐만 아니라 전쟁 및 영토 확장 성과, 도시 건설, 문화 장려 등 여러 면에 있어서 프리드리히 바로바로사 황제에 필적하는 인물이었다. 사자공은 특히 [[동방식민운동]]의 대표적인 군주로, 동쪽으로 가장 넓은 땅을 확장한 독일 군주이기도 했다. 허나, 바르바로사가 평생에 걸쳐 매진한 이탈리아 공략의 마지막 단계에서 군을 보내지 않았던 탓에 황제가 패배하자 분노한 황제에 의하여 제국 밖으로 축출, 몰락하고 말았다. 이런 관계 탓에 역사의 승자인 바르바로사는 위대한 인물로, 그리고 사자공은 보잘것 없고 오만한 인물로 묘사되거나 역으로 사자공 재평가에 들어가 프리드리히가 별다른 성과도 없는데 전설 탓에 미화된 군주처럼 여겨지는 기풍도 있으나 이는 다소 과장된 평가로 프리드리히는 당대는 물론 신성 로마 제국 역사를 통틀어 가장 강력한 황권을 휘둘렀던 군주 중 한 명이며, 그의 치세 하에서 제국은 어마어마한 경제적 발전을 거듭했다. 또한 1,600개 이상 존재했던 당시 독일 내부의 국가에 '''하나된 독일'''이라는 개념과 열망을 제시한 건 틀림없이 프리드리히였다. 애초에 남독일과 북독일의 상이한 문화에도 불구하고, 이들을 통틀어 하나의 독일을 이끄는 영웅 전설의 대표로 프리드리히가 꼽힌 건 '''프리드리히 자신에게 그런 의의가 있었기 때문'''이다. [[전설의 영웅|전설 속 영웅]]처럼 모든 전투에서 승리한 절대적인 [[정복군주]], [[알렉산드로스 3세|전술적 천재]]는 아니었으나 적어도 당대의 모든 이들이 프리드리히가 패배했다는 사실에 놀랄 정도로 어마어마한 업적을 세운 건 틀림없는 사실이다. 그가 이탈리아를 장악하지 못 한 건 분명하지만, 반대로 [[이탈리아]]에 영향력을 투사하거나 제국 내에서의 황제권이 교권보다 명확한 우위를 차지하는 데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군주인 점도 부정할 수 없다. 패배는 있었지만 대다수 학자들은 그 패배가 [[하인리히 사자공]]의 불참으로 인한 것임을 인정하고 있으며, 그 하인리히 사자공 또한 황제에게 [[숙청]]당하고 몰락할 만큼 어마어마한 권세를 자랑했던 건 사실이다. 가끔 사자공을 패배시키고도 그 휘하의 영주들에게 충성을 받지 못 했다거나 오히려 덕분에 [[왕권|황권]]을 약화시켰다는 평가를 붙이기도 하는데 이건 [[신성 로마 제국]] 내지 [[봉건제]]의 특징이다. 사자공과 연결된 영주들의 최고 상사는 어디까지나 사자공이지 프리드리히와 봉건 계약을 맺은 게 아니며, 때문에 황제에게 충성할 의무는 발생하지 않기 때문. 오히려 프리드리히는 당대에 어마어마한 황권을 누렸으며, 이를 가문의 후광 덕분이라 말하는 자들도 있지만 애초에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 자리는 가문의 후광이 없으면 오를 수 있는 자리가 아니며, '''"그 가문의 후광을 얻고도 프리드리히 수준의 황권은 커녕 제대로 된 황권을 세운 황제가 얼마나 되느냐?"''' 물으면 대답할 수 없는 게 현실이다. ~~그런 황제는 없었으니까.~~ 애초에 그가 황권을 약화시켰다는 말조차 애매한게 그의 후계자인 [[하인리히 6세]]는 '''당대 유럽에서 가장 강력한 황권'''을 휘둘렀다. 오히려 바르바로사의 후계자로서 황위에 오른 그를 보고 제국은 혈연 세습제가 아니라는 점을 강조한 귀족들마저 저항할 수 없을 정도의 권위를 자랑했다. 자기 대에 제국을 혈연 세습제로 바꾸려 한 시도가 좌절되기는 했지만 이거야 당대에 처리할 수 있는 쪽이 이상한 일이고(...) 그의 죽음과 연관된 반란 또한 그가 외국에서 대뜸 책임자의 모가지를 날려버리는 등 폭정을 거듭했기 때문이지 왕권이 약했던 게 아니다. 차라리 저 이후의 독일 왕위 분쟁 때문이라면 또 몰라도. 굳이 따지자면 프리드리히가 [[신성 로마 제국]]에서 권위의 몰락 비슷한 걸 경험했다면 프리드리히 1세의 황권과 하인리히 6세로 세습된 제위 등 지나치게 안정화된 [[호엔슈타우펜 왕조|호엔슈타우펜 가문]]의 집권 탓에 주변 가문들의 견제를 산 탓이지 후대의 황권 약화 빌미 기반을 마련했다고 평가하기는 힘들다. 어느 쪽이든 프리드리히 1세는 파란만장한 삶을 보냈고 그런 삶에 어울리는 업적을 세웠다. 그러나 전설 속 모습처럼 무적의 군주나 어떤 불만 하나 없이 독일 민족 전원을 이끄는 기수는 아니었으나, 그렇다고 해서 그 업적을 깎아내릴 이유도 없다. 프리드리히 1세의 업적을 살펴보기 위해선 그 업적의 과장된 면이나 깎아내린 면에 호도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할 것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